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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부산 부암동 선암사 그리고 천상병의 귀천

부산 부암동 선암사 그리고 천상병의 귀천

선암사는 백양산 남동쪽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백양산은 태백산맥 남단에 위치한 산으로 부산에 위치하고 있다 사상구, 부산진구, 북구에 걸쳐 솟아나 있다 산정상부터 동쪽에 자리 잡은 구는 부산진구이다 북쪽부터 보자면 초읍동, 부암동, 당감동, 개금동을 포함하고 있다 초읍동은 계곡이 발달되어 있는데 어린이 대공원을 중심부에 성지곡지라는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산정상의 정동쪽으로 어린이 대공원으로 빠지는 계곡 외에는 물이 있는 계곡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 부암동과 당감, 개금동이 산 정상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아파트 등 주택들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산의 계곡물이 흘러 내려갈 만한 지세로 보이지만 물길이 보이지 않는다



산업화 되면서 물길을 지하화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근까지만 해도 작은 하천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계곡의 규모 치고는 작은 하천이긴 했다 이 3개 동이 자리잡는 큰 계곡 부분은 하천 대신 콘크리트가 덮여 있다 오래된 아파트가 많다 그 중 신축하는 아파트들도 보이긴 한다 피란민의 도시 부산이라 전혀 계획 없이 지어진 오래된 주택가들이 많이 눈에 들어 온다 이 동네의 면적은 해운대 신시가지와 비슷하지만 시간에 쫓기듯 질서 없이 지어져 동네 미관에 많은 차이가 난다


주목할점은 부암동이 부산시의 정중앙이라고 한다 서쪽으로 강서, 동쪽으로 기장을 다 포함해서 무게 중심으로 보인다 정중앙이라고 표시된 비석도 있었지만 아파트가 그 자리에 들어 서는 바람에 비석은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동네는 과거 월남전 파병 용사들이 거처했다고 해서 용사촌이라고 불린 것으로 보인다 지역이 원도심과 비슷하나 바다가 보이지 않고 남쪽 대로의 고가 다리 때문에 관광 산업이 발전되지 않았다 그러니 동네가 낙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고가다리를 없애는 것을 관에서 추진하고 있지만 그 마저도 철거 비용 때문에 고가다리를 그대로 놔두고 재생을 하자는 의견도 분분하다 왜냐하면 고가 다리를 이제껏 튼튼하게 써 왔던 것 만큼 튼튼하게 지었으니 철거하려면 일이 많고 비용 또한 많이 들 것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가다리를 재생하여 공원화 시킨다고 하면 관광을 목적으로 할 것이다 하지만 고가 다리나 열차 정비소로 막혀 있어 발전이 더뎌 낙후된 곳을 감천문화마을처럼 정비를 해야 될 것이다 고가 다리가 공원이나 산책로로 쓰인다면 전망도 괜찮아야 되기 때문이다 전망이 좋지 않는 걸 신경 안 쓰려면 고가 다리를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고 공원화 하려면 그 동네의 미관을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 곳은 3개 동이 모여 있을 만큼 작은 동네가 아니지만 고가 다리, 열차 정비사업소 등 때문에 마치 통일 안 된 한반도 처럼 남북으로 철저하게 갈려 있는 형국이다 고가 다리가 아니더라도 동네 자체가 막혀 있다 행운대 신시가지처럼 비슷한 시기에 함께 신도시를 만든다면 깨끗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지어져 있는 학교와 주택들이 많다


부산의 정중앙이라고 하니 만큼 중심이 바로 서면 하는 마음과 함께 서서히 도시를 정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다른 것 다 두고서라도 문제가 있는 것이 전체적으로 북쪽 산기슭까지 아파트 등 주택이 많은데도 지하철과의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계곡 북쪽 끝인 선암사 입구에서 부암역까지 도보 최단 거리가 3.4키로미터이다 이런 동네가 기장군 빼고는 부산에서 몇 군데 없다 남구 용호동, 영도, 명지 신도시만큼 도시 철도 이용이 쉽지 않은 동네이다 용호동은 트램을 준비하고 있고 명지 신도시는 지하철을 준비하고 있다 영도 또한 도시철도를 준비 중에 있다 하지만 유독 앞이 철도와 고가다리에 막혀 있으면서도 지하철 계획이 전무후무하다


그런 와중에 최근에는 명지 신도시의 버스 노선을 증가 시키려고 이 동네의 버스 한 노선을없앨 계획까지 관에서 세웠다가 절충 했지만 과거보다 불편을 겪게끔 더 축소 되었다고 한다

등잔밑이 어두운 걸까? 부산의 정중앙은 지방 소도시처럼 개인 승용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니 선암사를 찾아 가는 것이 부산에서 울산 관광을 하는 것처럼 접근성이 떨어져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동네에서 서면까지 지하철을 타고 그 자리에서 17번 버스로 갈아 타고 보이는 창밖은 답답한 고가다리와 그 꼬질꼬질한 외벽을 갖고 재건축 할 때가 훌쩍 지난 것 같은 상가들이 보였다 차라리 지하철이 있었다면 안 보였을 텐데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처음 가는 곳이기 때문에 남단 대로변 부터 걸어 올라가며 용사들의 얼이 묻어나는 동네를 두 다리로 확인하고 싶었다

생각보다는 경사가 급하지 않았다 남북 거리가 길어서 그런지 경사가 있다고 생각할 만하지 않고 편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다 보니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그 옆으로 보이는 동네는 공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사는 이 때부터 급해 졌다 목적지와의 거리는 500미터 밖에 안 됐지만 땀이 한창 떨어지며 가파른 등산을 아스팔트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암사 입구에 당도하니 선암사 안내표지는 있었지만 선암사로 이어지는 인도가 없었다 단지 아스팔트로 차만이 다니는 아스팔트 뿐이었다 어떻게 이 동네는 포용을 해야 하는 절까지도 사람의 이동권을 보장하여 주지 않나 라는 잠시의 안타까움 뒤에 상쾌한 바람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보통 부산에 있는 절들은 산과 마을의 경계 지점에 있다 마을을 벗어 났다는 말은 산에 가는 시작점에 있다는 말이 된다



선암사 입구에서 1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니 선암사가 나왔다 산 중턱에 있는 만큼 경사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특유의 향 냄새와 산뜻한 바람이 만나 정감 있게 코를 뚫어 주었다 선암사는 왜 선암사라고 했을까?

큰 절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게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범어사의 위성 절이라고 한다 범어사는 원효대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2곳 다 원효대사의 흔적이 있다 여기에는 계곡물의 본류일까 생각되는 작은 물길이 있다 아기자기하게 바위를 잘 깎아 내어 불상과 산뜻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반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 있고 다소 소규모이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 보였다 산과 조화롭게 부속 건물들이 배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가지 모습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시내와 가까운 절이니 만큼 전망이 나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물이 상쾌하게 내 목을 뚫어줄 수 있었다

우리 역사의 땅 중에 가장 큰 땅을 가졌던 고구려가 있다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여 고려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구려와 고려는 누가 봐도 차이가 나는 이름이다 하지만 고구려 때 이미 고구려를 고려나 구려로 얘기 했었다고 한다 요즘은 활자 문화를 거쳐 인터넷 세상이다 글자로 소통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한글과 같이 발음 문자라면 정확하게 아 와 어 가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는 뜻 글자로 소통을 했다 이두 등 한글 같은 글자를 병행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소통이 안 될 때도 있었다 통신 교통, 보관의 불편 때문에 고려나 구려나 같은 말로 구전되었던 것이다


선암사는 화랑들이 무예를 익히거나 학업에 정진하는 곳이다 화랑은 성균관 유생처럼 장차 장군등 사회 리더들을 만들기 위한 교육생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학생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렇다면 선암사의 암은 앎이 구전되다 굴절이 된 거 아닐까? 선이라는 말은 먼저 선자를 많이 쓴다 화랑은 성균관보다는 더 어린 나이의 최정예 학생들을 가르킨다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화랑들이 앎을 위해 활동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선암사라는 절 이름을 썼다는 것을 유추해 본다

어떻게 보면 학생들이다 일반 시민들이 가는 곳은 범어사이고 학교로 쓰인 곳은 선암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절이 크지 않고 학생들만 실력을 양성할 만한 규모로 지어 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부암동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부산이 왜 부산이냐고 유추하면 산이 많다고 부산이라고 말 하기도 한다 국내로 보자면 산은 크든 작든 없는 곳이 거의 없다 하지만 부산은 평균 6백 미터 정도의 작은 산들이 오밀 조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산이 많다고 하여 부산이라고 보기도 하고 불산이라고도 한다 과거 왜적이 대마도를 통해서 가장 먼저 침략하는 곳이 부산이었다 그들이 산에 불을 지르며 약탈을 한다고 하여 불산을 달리 부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유추한다 그렇게 전쟁이 많으니 동래읍성이 발달되어 있었고 전초 기지로 쓰였으니 남자가 중요히 많이 필요했다 전쟁 때는 남자가 많이 죽었으니 아버지가 될 만큼 오래 살고자 하는 바람이 아비부 자를 써서 부산이라고 한다고도 말한다





선암사를 보자면 부암동은 앎을 많이 채워 아버지가 되게 한다라는 의미 외에는 달리 해석하기가 애매하다 적의 침략으로 아비가 되기도 전에 빠르게 죽어 가던 부산의 남학생들이 아비가 될 수 있도록 문과 무를 양성하여 나 자신과 이웃과 나라를 지키라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그런 부암동 앞에 철도 차량 정비처가 왜 만들어져 있을까? 일제 시대에 보통 철로를 만들었었다


옹기종기 건물들이 모여 있는 절간을 뒤로 하고 보이는 곳이 산길이었다 다음의 목적지는 어린이 대공원이었다 차를 타고 가려면 빙 둘러 갈 만한 초읍동이지만 산길로 가게 되면 거리가 그리 멀지가 않다고 판단하여 산길을 따라 가봤다 초행길이라 처음 보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는데 처음 발을 디뎠던 길은 자갈길이었다 트럭 한대는 충분히 지나갈 만한 너비의 길이 나 있었다 그렇다면 산을 가꾸는 등 관리하기 위해 찻길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산길을 알려 주는 것은 한계가 있어 인터넷을 참고하여 감으로 방향을 잡아 가며 걷길 시작했다 좀 있다 나오는 것이 천상병의 귀천이라는 시가 표지판처럼 소개되고 있었다

천상병은 간첩으로 오인받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며 고문을 받는다 출소 후 시를 썼다고는 하나 해석해 보면 옥에서 시를 이미 썼고 발표만 출소 후 했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이 귀천이라는 시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은 자살을 암시하는 시이다 물론 자살을 하고 싶은 마음을 시로써 승화시키고 자살을 행하진 않는다

고문을 6개월 동안 받으며 고통이 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늘로 돌아간다며 죽고 싶어도 못 죽는 상황을 무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첫째 구절을 시작으로 고통이 올 때마다 시를 이어 나가며 계속 썼지만 발표될 때 3연만 발표했을 것으로 보인다


죽고 싶다 새벽에 고문을 받고 쓰러지고 눈물이 흐르며 두 손은 묶여 있다

죽고 싶다 저녁이 되어 또다시 교도관과의 고문 시간이 되어 생사를 왔다 갔다 한다

죽고 싶다 고통의 시간을 잠시의 소풍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견디자 고통스로움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같이 거짓이라 해도 그들이 말하는 죄를 인정해야지만 고문이 덜할 수도 있으니 그들의 말에 죄를 인정 하자


6개월 동안의 감옥 생활이 아니였다면 이런 시 해석은 커녕 표현미가 돋보이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였겠지만 이 시는 고통만큼 미친 시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반어법으로 고통을 승화시키는 안타까운 호연지기는 어떻게 나왔을까?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로써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잠시 바라 보며 어린이 대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글은 고증된 것이 아니고 필자의 주관이 들어가 있음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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